카테고리 없음
악보가 자라는 곳
김덕진요셉
2011. 12. 8. 14:16
악보가 자라는 곳/김덕진
철새들이 양파껍질처럼 벗겨진 노을을
한 조각씩 등에 나눠싣고
순결한 날개 짓으로
품이 넉넉한 서쪽하늘에 점이되어 박히는 저녁이다
앞치마를 두른 그녀가
새로운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관객 한명 없는
공연장으로 홀로 들어섰다
도마 위에 오선지를 그려놓고 길게 늘어트린
생각의 실타래를 가위질하며
여유로운 손놀림으로 사랑의 음표를 수놓는다
그녀의 작은 공간에서 셀 수없이
창작되고 반복되었을 공연을 모아 엿을 고듯 고은다면
그 맛은 점성(粘性)에 맥박이 따뜻하게 뛰는
심장을 닮은 맛일 것이다
그녀가 완성한 악보가 도마 위에서 잘게 썰리며
난타공연이 시작되었다
압력밥솥의 추 흔들리는 소리가 멎자
초대된 관객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썰린 악보가 하얀 자기그릇마다 봉긋하게 얹혀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느낄 수 있는 이곳은
종합예술공연장인 주방,
그녀의 소박한 공연장에서는 언제나 악보가 새파랗게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