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아버지의 돛
김덕진요셉
2020. 9. 10. 12:24
아버지의 돛/김덕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가을햇볕이 팝콘처럼 튀겨지는 어느 날 오후
잠재의식에서 풀려난 선험적 경험의 한 장면이
그대로 복사되어 재현되는 듯
알 수없는 무엇인가에 이끌려 아버지의 낡은 책상서랍을 열었다
한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던 서랍 속에는
돛처럼 해진 기도서와 묵주와 호적이
묵은 시간을 베고 누워있었다
긴 항해를 마친 내 아버지의 인생여정의 돛은
겉표지가 해져 너덜거리는 기도서,
페이지를 넘길 때 침을 바른 손가락이 책에 심어놓은 지문은
각 페이지의 하단 오른쪽 모서리에서
노란 꽃으로 피어 숙성되었다
빛을 모은 돋보기처럼 윤곽이 희미해진 생각을 한곳에 모으고
하늘 편에 섰던 아버지의 색깔을 더듬기 시작했다
자신이 추구한, 너무나 가혹했던 결핍의 행복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타인을 위한 사랑의 변주였다
아버지의 삶은 하늘 쪽으로 기운 곡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