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밥을 먹었다

김덕진요셉 2021. 5. 8. 08:04

들밥을 먹었다/김덕진

 

아무 일도 없는 날이 지속되면 불안 쪽에 밑줄을 긋곤 했다

주말아침 일찍 나를 일으켜 세운 아라비아숫자들이

냉기가 서성이는 논으로 몰았다

농사가 본업인 친구의 부탁으로

오늘하루 들에서 벌이는 모판 볍씨파종작업에

내 손을 빌려주기로 한 날이다

나보다 앞서 작업장에 나와 있는 일꾼들이 파종기계 앞에서

말의 싹을 틔워내고 있었다

살얼음 낀 하늘을 깨뜨리듯

누군가 한 뭉치 꺼낸 말이 허공을 때리자 기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농사기술이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공정을 맡았으나

경험이 없는 난 마지막 공정을 끝낸 모판을 날라 적재하는

단순작업을 담당하였다

일개미가 연신 흙을 물고 나와 굴밖에 쌓듯

줄지어 나오는 모판을 파렛트 위에 쌓았다

덜컹이는 지루한 시간을 건너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별이 뜰 때까지

나를 지워야 했다

 

볍씨가 파종된 모판에서 누룽지냄새가 새어나왔다

 

오늘밤은 멜라토닌이 찾아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