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걸려온 전화 한통이

김덕진요셉 2023. 2. 1. 21:33

잘못 걸려온 전화 한통이 /김덕진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선 이따금씩 빛의 뿌리가 하지정맥류처럼 뻗치고

대지의 건반을 적시는 소리는

컴퓨터자판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환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끊어진 비의 현들이

빗소리의 연주를 소재로 긴 악장을 완성할 무렵

호주머니 속을 흥건하게 채운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허공에 악보를 펼쳤다

처음 보는 번호가 가슴언저리를 흔들어 놓았던 그날의 벨소리는

한동안 빗소리 묻은 발화점으로 굳었다

 

내 전화번호와 끝자리숫자 하나만 달라

잘못 눌러 죄송하다는 정중한 사과와 지적인 어투의 결이

내 마음 깊은 곳에 고요한 파문을 일으켰다

 

내가 기침을 하면 젖은 바람이 불었으나 바람의 표정은 언제나 똑같았다

 

나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소리를 풀어서 여러 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루하게 내리던 비도 나의 것 같아 싫지 않았다

안개속의 얼굴을 수없이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내 심장에 불을 피우는 소리를 꿀꺽 삼켰다

내 휴대전화의 악보를 연주한 사람은 바로 안개속의 그녀였다

국문학을 전공한 그녀, 영문학을 전공한 나 우린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았다

코스모스를 닮은 그녀는 *Quelques Notes Pour Anna의 선율과 너무 잘 어울렸다

 

비 오는 날엔 여전히 그녀가 내 맘에 띄어 놓은 가랑잎 한 장 출렁인다.

 

 

*Quelques Notes Pour Anna (슬픈 안나를 위하여 눈물로 적은 시)

/Nicolas de Angel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