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대추벌레
김덕진요셉
2023. 4. 19. 20:01
대추벌레/김덕진
지난 봄날 대추나무에 내려앉은 별꽃들이
목젖이 보이도록 팡팡 터트렸던 웃음을 기억한다
그때의 그 환한 웃음을 봉인한 붉은 반점이
숯불처럼 타오른다
봄과 여름을 압축한 시간이 다녀간 흔적,
반점의 색깔이 짙어갈수록 고개를 깊이 숙인 대추나무의 그림자는
해독해야 할 상형문자의 전언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대추 한 알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순간까지
돌무덤처럼 단단한 씨앗의 고요를 키우며
은하의 물결을 지우는 꿈을 밤의 아궁이에 지핀다
온몸에 붉은 노을이 번진 것은
불면의 밤을 적시는 비처럼 서서
해와 달과 별을 품은 시간을 숙성시켰기 때문이다
상형문자로 채워가는 대추나무 밑의 그림자,
오늘은 각주가 없어도 될듯하다
빛이 없는 붉은 괄호 속에서 농익은 어둠을 갉아 굴을 파고 있을
작은 숨을 생각했다
토르소의 침묵을 가둔 괄호가 열릴 때까지
그림자의 혈관을 찾는다
내가 붉은 괄호를 깨무는 것, 한 생명의 음계를 허무는 일인 것 같다
대추 속에서 우물을 파고 있는 작은 숨, 우주를 캐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