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호박이 앉았던 자리
김덕진요셉
2023. 5. 12. 11:12
호박이 앉았던 자리/김덕진
소 발자국 같은 호박잎을 여름 내내 몰고 다니며
여인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닮은 호박을 순산한 줄기가 가을 냄새를 맡고
허옇게 부식되어가는 뼈를 드러냈다
호박이 세 개의 계절을 깔고 앉았던 움푹한 자리에 누렇게 뜬 풀잎이 누웠다
하늘이 가려져 미각을 잃어버린 시간,
죽음의 질서는 밤과 낮을 공유한 내부를 향했다
비에 젖은 흙속에서 지렁이의 꿈이 비릿하게 피어오를 때
나는 탯줄에 매달린 작고 푸른 눈동자를 보았다
귀에 도랑을 내고 탯줄이 힘을 주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늙어가는 방법을 배웠다
채집된 시간이 둥글게 영글어갔다
곡선의 문장에 숨겨진 태초의 울음을 찾는 방법을 배웠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가 떠오르더라도 하나의 그림자만 늘어트릴 것 같은
고집스런 우직함이 좋았다
태양과 달이 주고받은 밀서를 깊숙이 감춘 몸,
생을 내려놓은 색깔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면 나는 마지막 날 내 얼굴에서
웃음을 떼어내지 않을 것 같다
두레상 둘레에 앉아 호박죽을 먹으며 숟가락에 서로의 얼굴을 담았던 시절이
사막의 갈증처럼 목마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