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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바람은

그녀의 바람은/김덕진 그녀의 웃음이 나를 다녀간 이후내 마음에 깔아놓은 생의 선로는 누런 녹물을 흘리며소실점을 일어버렸다휘어진 생의 곡선을 따라선로 밑에 깔린 검은 침목의 침묵이 첼로의 현처럼 흔들리고차가운 별이 뜬 어깨뼈가 몹시 저렸다내가 꾸는 꿈의 길목마다 점멸하는 황색 신호등으로황달 걸린 나의 밤은 새벽까지 가려웠다차라리 비에 젖어 빛나는 돌의 풍경이 되고 싶었다무너진 고성을 어루만지는 해를 안고 여기까지 온 나는 이제바람의 입구를 막을 때가 되었다바람이 되어 나에게 왔던 모든 것, 어제의 바람이 낸 길을 묻지 않기로 했다 오래전 발굴된 구성에 집을 짓고물구나무서는 거미의 목청으로수몰된 이름을 꺼낸다그녀가 버린 바람은 덜컹거리는 내 생의 녹슨 선로에 첨부된 책장 속의 지문 같은 별지.

시 2026.10.16

종의 기억

종(種)의 기억/김덕진 내가 신 앞에서지상의 노숙자로 살아가는 동안 내 몸은 기억한다세상에 터트린 내 최초의 울음이문자로 빚어지기까지새벽을 일으킨 어머니의 목소리에 내 몸이 감기고어머니의 입김이 내 푸른 심줄을 키웠음을 내 몸의 서문은일찍이 어려서부터 들어온 어머니의 말씀을 인용한 글로 채워놓았다영혼의 찌꺼기를 걸러낼 잠언 같은 문장,이따금 적의를 품은조준된 화살의 과녁이 되기도 하였으나 문장에 오류는 없었다하늘을 쓸고 있는 억새꽃처럼 지상 순례의 여정을 환하게 마친 어머니를 통해새벽안개의 아픔을 알았다거룩한 영혼은 가슴을 부식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 이빨을 경계하고 때로는 허기에 머물 줄도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내 발자국 위에 얹힌 누군가의 발자국, 울음의 낱장들이 쌓인 가슴으로남몰래 수없이 달을 환약..

시 2026.10.09

바퀴 자국

바퀴 자국/김덕진 알루미늄 빈 캔, 빈 술병을 보면내 마음에 유모차의 바퀴 자국을 깊게 새겨 놓으신어머니 같은 그분의 봉인된 음성이 귀에 도랑을 내고내 안부를 묻는다 작은 체구에 고령인 그분은허름한 빌라 반지하 단칸방을 얻어 홀로 기거하면서매일 폐품을 줍기 위해동네 골목에 해진 발자국을 낙관처럼 찍으며 유모차를 밀고 또 밀었다밤마다 차가운 별로 뜨는 지난 세월의 아물지 않은 상처, 덧난 환부에 고약을 붙이듯거친 숨을 고르며 낡은 돛을 올리고 골목을 항해했다 십여 년 전에 우리 집 앞에서 우연히 만난 분,책, 신문, 박스, 병, 캔 등 버릴 폐품이 있냐고 물으신 그분과의 인연이그때부터 올봄가지 지속되었다 나는 그 후로 원룸 세입자들이 마시고 내놓은빈 맥주캔과 빈 소주병이 어느 정도 모이면 차에 싣고 그분..

시 2026.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