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판 우물/김덕진
어릴 적 어느 해 봄날
할아버지께서 대패로 햇살을 깎고 계셨다
대팻밥이 된 햇살들이
순장의 흔적처럼 땅바닥에 엎드려 속살이 드러난
흙냄새를 맡았다
집짓는 일꾼들이
주춧돌을 놓기 위해 큰 메로 지구를 찧을 때마다
지축의 울림은 영원의 시간을 만지는 듯했다
망치소리, 허공을 자르는 톱 소리, 대팻날이 먹고 토하는
소리가 서로 부딪히며
보금자리의 목마름에 물을 축였다
노깡이 없는 집터의 우물가에서
누나가 봄나물을 씻고 있을 때
난 우물 속에 들어있는 내 물그림자와 함께 놀았다
어느 순간 물그림자가 내 얼굴 삼키고
와락 끌어안았다
난 지느러미 없는 심해의 물고기가 되었다
영원의 시간으로 초대되기 전
누군가 내 몸에 돋은 물의 비늘을 물 밖에서 털어주었다
지금은 집도 우물의 흔적도 아쉬운 갈증
한 모금이 되어 찌르지만 가끔은
마음에 판 우물 속 물고기의 아가미로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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