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판 우물

김덕진요셉 2012. 9. 3. 13:51

                       마음에 판 우물/김덕진

 

어릴 적 어느 해 봄날

할아버지께서 대패로 햇살을 깎고 계셨다

대팻밥이 된 햇살들이

순장의 흔적처럼 땅바닥에 엎드려 속살이 드러난

흙냄새를 맡았다

집짓는 일꾼들이

주춧돌을 놓기 위해 큰 메로 지구를 찧을 때마다

지축의 울림은 영원의 시간을 만지는 듯했다

망치소리, 허공을 자르는 톱 소리, 대팻날이 먹고 토하는

소리가 서로 부딪히며

보금자리의 목마름에 물을 축였다

노깡이 없는 집터의 우물가에서

누나가 봄나물을 씻고 있을 때

난 우물 속에 들어있는 내 물그림자와 함께 놀았다 

어느 순간 물그림자가 내 얼굴 삼키고

와락 끌어안았다

 

난 지느러미 없는 심해의 물고기가 되었다

 

영원의 시간으로 초대되기 전

누군가 내 몸에 돋은 물의 비늘을 물 밖에서 털어주었다

 

지금은 집도 우물의 흔적도 아쉬운 갈증

한 모금이 되어 찌르지만 가끔은

마음에 판 우물 속 물고기의 아가미로 숨을 쉰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플릿공항 로비에서  (0) 2012.09.11
세상너머의 언어  (0) 2012.09.05
지구는 매일 밤 업힌다  (0) 2012.08.21
밤나무, 그늘을 지우다  (0) 2012.08.16
선풍기  (0) 2012.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