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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주의 운하

김덕진요셉 2013. 1. 13. 17:34

  

                        전신주의 운하/김덕진

 

전신주는 아픈 곳이 없는데

사람들은 늘 친절하게 색상이 다양한 파스를

붙인 곳에 덧붙여주었다

오늘은 하얀 치마를 입고

거리의 소품 되어 농도 짙은 욕망의 색채를 대신 흘린다

누군가 전신주의 허리에 숫자를 넣어 오려 만든

후레아치마를 입힌 것이다

치마에 달라붙은 숫자의 기다림

바람의 곡성을 입어 불길처럼 흔들리고 있으나

눈으로 만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덩그런 무관심의 배후에서

뒤틀어진 시간의 톱니바퀴에 내몰린 숫자들이

보이지 않는 출구를 더듬는다

전신주의 머리에 흐르는 캄캄한 운하

고유번호가 매달린 수천 개의 회선이 재생을 반복하며

소멸된 목소리를 실어나른다

치마폭에 기댄 숫자들은

검은 운하 속을 통과시켜줄, 온기 스민

손가락의 지문을 기다리는 중이다

전신주의 발꿈치에 서있는 헌옷수거함의 입으로 목 늘인

기다림이 빨려 들어가고

핏기가시지 않은 지상의 전언은 긴 운하의 침묵에

충돌의 씨앗을 발아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