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김덕진
용주사 범종 안에 그의 목소리가 있다
물의 갈비에서 살을 발라내는 소리가 하수구로 들어간다
콘크리트바닥에 엎어진 개밥그릇은
그에게 끌려 다니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원을 그렸다
그의 천체는 평면이다
지구에 박힌 쇠파이프 축을 중심으로 그는 오래전부터 시계방향으로
자전하기 시작했다
대문밖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의 머릿속은 아르키메데스의 수학공식으로 가득 차 보였다
뇌에 저장된 냄새 외에 낯선 이의 체취를 맡으면
입가에 붙은 포말을 터트리며
본능적으로 아르키메데스의 원주율 공식을 생각했다
그는 필요할 때 마다 그의 둥근 영역과 달 사이,
지구와 태양 사이에
무수히 많은 목소리의 징검다리를 놓았다
그가 사랑한 것은 틈이었다
모래언덕처럼 무너지는 부활 없는 틈이었으나 그는 한 가지만 생각했다
한해살이의 아픔을 겪더라도 바람의 고함을 닮는 것,
주름 접힌 바람의 틈새에서
뒤척이며 모로 눕던 내 마른 목소리만 기억한다
오늘도 그는 자전하며 아르키메데스의 원주율 공식을 또
탁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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