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질

김덕진요셉 2015. 10. 28. 17:07

키질/김덕진

 

서쪽하늘이 단감색깔로 써레질되었다

태양이 낮의 빗장을 걸 무렵

세월의 무게를 등에 진 이웃집 할머니가 지문 꽃 핀 악기로

늦가을 저녁 검불을 날린다

할머니의 악보 없는 연주는

허기진 과거를 기억하는, 부뚜막 같았으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포만감이 들어있다

할머니의 악기 안에서 튀어 오른 단단한 땀방울들이 하늘을 쓰다듬고

수직으로 낙하하는 소리에 별들이 쏟아 붓는 코러스가 섞여

하얀 민들레 밭처럼 일렁인다

하늘과 땅의 거리는 할머니의 발과 무릎사이에 있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울타리의 경계를 뛰어 넘은 소리의 틈새다

 

틈새 안을 가득 채운 수천 개의 액자 속에서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점과 선이 튀어나와 무중력 속

저녁 배경이 되어 유빙처럼 떠있다

아버지의 해와 어머니의 달이 교신하는 소리에도 틈새는 있었다

하늘과 하나 되었다가 떨어지는 땀방울 소리에

오래 묵은 장 같은 그림이 묻어있다

 

곱게 써레질된 저녁하늘에

비행기가 스팀을 뿜으며 울퉁불퉁하게 구겨진 구름을 다림질하고 간다

 

할머니의 악기에서 밀려난 쭉정이와 검불이 불을 기다리고 있다

내 몸에 붙어있는 검불에 불을 붙였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쪽지  (0) 2015.11.25
가을비  (0) 2015.11.15
고추, 그 붉음을 읽다  (0) 2015.10.03
이슬  (0) 2015.08.02
거울  (0) 2015.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