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처럼 나도/김덕진
지상의 출구가 뿌옇게 메워졌다
가로등도 답답한 듯 진저리친다
모든 틈새를 메운 안개가 지상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세상이 공평하다
시력이 좋은 사람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나
새벽의 배경으로 다가온 모든 사물이 희미하게 흩어지긴 마찬가지다
단색으로 채색된 몽환의 세상이 목소리를 숨긴다
둥근 밤을 어루만지는 안개의 서문을 읽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새벽을 여는 순례자의 이마를 적신
눈부신 침묵의 무게를,
어둠에 길들여진 안개가 제 모습을 버릴 때는 젖은 그림자를 남긴다
축문 같은 안개의 지문이다
안개의 시간을 더디게 건너가고 있는 지금이 나는 그냥 좋다
이제 나도 나를 지운다
곧 지워질 이 아늑한 평화의 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