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베끼다/김덕진
나는 바람에 걸려 넘어진 적 있다
변방에 유배된 바람이
최초의 눈물을 섞어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흐느끼는 섬처럼 떨며 지새웠을까
날마다 맞이하는 아침이지만
나의 아침은 늘 금이 간 바람을 열고 나왔다
나는 피 흘리는 바람을 본적 있다
IMF의 한파로 전지가위가 허공을 건너다니며 춤을 출 때에도
나의 가지는 피한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피 묻은 바람이
사람들의 무릎을 휘감고 오르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더러는 바람의 나라에서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했다
피 냄새를 기억하는 바람은
공포로 요약되는 환각의 경계를 지우고
신열로 달궈진 열꽃을 피웠다
바람의 파편을 우회하여 깨진 거울 속에 숨어있는 것이 거울 밖보다 안전했다
바람이 더 이상 나의 잔상을 알아보지 못했다
칼끝에 매달린 나의 그림자 한 토막에서 새순이 돋기 시작했다
낯설지 않은 타향살이 한 페이지가 또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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