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은 혀가 바쁘다/김덕진
언제부턴가 비오는 날엔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내게 한때 빗소리는 아라비카향을 담은 커피였고
꿈을 심은 책이었고
빈 가슴의 현을 울린 악보였던 적 있다
이제는 빗방울 죽음의 가락을 들으면
눅눅해진 자화상의 한쪽 모서리에서 곰팡이 꽃이 자란다
빗방울이 죽어야 자연이 눈을 뜨는
극한의 대립적 모순, 얼마나 놀라운 질서인가
셀 수없이 많은 세상의 소리 중
유독 빗방울 죽는 소리가 하얗게 체한 명치끝에 매달린다
비오는 날 나의 독백을 끝까지 들어줄 이 아무도 없는데
다듬어지지 않은 말을 꺼내놓는 이유는
비의 뒤끝이 늘 매웠기 때문이다
그때는 손바닥에 매설된 통점이 온몸으로 번지고
내 안의 내가 너무 낯설어진다
비가 멎으면 젖은 풍경과 마주해야할 두려움을 구부리기 위해
입으로 성벽을 쌓은 것이다
승강기의 비트에 또 고여 있을 그 빗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