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김덕진
봄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세상을 향해 목젖이 보이도록 환한 웃음을 터트리려는
꽃망울의 몸살을 숨길 수 없지만
나에게는 절대로 남들한테 들키지 않는 것 한 가지가 있다
당신한테 허락을 받지 않고 어쩌다가 당신 꿈을 꾸어도
아무도 눈치 채는 이가 없다는 사실,
이상한 집을 허문 우리의 꿈속 대화는 자주 어긋났지만 필름에 감긴 당신은
내 몸 밖으로 출력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기울어진 꿈을 넘는 당신의 차가운 등이
내 마음을 닫아 주었을 때
나는 내 이름을 꺾고 손바닥에 담을 수 있는 것만 생각했다
당신의 뒤엉킨 뇌는 내가 가까이할 수 없는 혼돈의 질서를 무수히 나열하고
내가 은신할 퇴로를 차단했다
이따금 활자냄새를 몸에 바르고
책속에서 걸어 나온 당신의 눈동자에 뜨거운 해일이 일어났음을
내 손에 쥔 그림자가 먼저 알아차렸다
가슴을 닫은 당신의 얼굴은 오직 나에게만 난반사되었다
내가 당신 손을 잡는 순간 당신 손이 모래알처럼 내 손가락사이로 흘러내렸다
가공되지 않은 채로 가둔 당신의 세상이 흘러내렸다
누군가를 깨울 각진 새벽이 자막도 없이 서서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