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넝쿨

김덕진요셉 2022. 10. 27. 22:30

호박넝쿨/김덕진

 

언젠가 한번은 내 발자국이 묻혔던 곳

봄 햇살이 붐비던 날 나는 그곳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호박모종을 심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고통의 다른 이름을 기다리며

소발자국 닮은 잎을 세운 호박넝쿨이 소처럼 느리게 간다

시간이 익어 가면 누군가의 눈엔

정물화의 주제로 비춰질 고통의 노래를

마무도 모르게 속으로 굳히며 간다

만삭의 꿈으로 가려운 호박순의 촉수,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하얀 그늘이 머물던 자리에

가장 낮은 돌탑을 쌓고 있는 중이다

 

밤마다 우주가 기우는 소리를 듣고 촉수를 세워 달 분화구를 더듬었다

생을 꾹꾹 눌러 담은 둥근 서시를 낳기 위해 매일 밤 달을 복제하였다

둥근 내벽을 채우기 위해 밑줄을 깔고 뱀처럼 기었다

 

시간의 탯줄을 감고 호박넝쿨이 지나가는 길목,

이제 유월 중순인데 키 작은 코스모스가 노란 목젖을 보인다

몸이 생각을 앞섰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일찍 나와서 웃을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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