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김덕진
작은 고구마 밭이랑에 씌어 놓은 검은 비닐 위에
발자국 퍼포먼스의 흔적은 예술적으로 남겼던 이가
바로 너였구나
지상의 노을에 한 번도 젖어본 적이 없는
하늘의 별자리 같은 발자국,
나는 그것을 추상적인 판화의 작품으로 받아들이고 구멍 난 비닐을 땜질하는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점자 같은 동그란 발자국을 해독할 수 없었지만
수혈받은 동그란 햇살에 우주의 시간이 늙어가고 있었다
내가 세상에 첫울음을 던지고 난 이후
내 마음자리를 그다지 넓히지 못하고
오늘도 그림자의 유 ㄴ곽을 지우며 내 이름을 밀어내는 중이다
바람이 갈참나무의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나뭇잎이 흐느끼는 소리를 헤지고
고라니의 순한 눈망울을 훔치는 순간 고라니의 뒷다리에 차인 허공이 비명을 질렀다
고라니가 용수철처럼 튀어 나간 고구마밭에 잎사귀는 없고 우산살 같은 줄기들이
수직으로 서 있었다
그물망을 치지 않은 내 고구마밭은 고라니들의 만찬장,
나의 게으름이 거룩해지는 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