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의 무늬

김덕진요셉 2025. 7. 5. 09:05

방랑의 무늬/김덕진

 

찬비가 내리는 늦가을 밤이었다

보도블럭에 달라붙은 판화 속 풍경이

밑그림 없는 바람에 저항하고 있었다

비에 젖은 가로수의 낙엽,

곧 살얼음이 낀다는 예언을 담은 색깔로 인도에 퀴트가 되어 박음질 되었다

자정까지 끼니를 때우지 못한 상점의 간판 조명이

하나둘 어둠과 하나 되어갔고

어둠에 봉인된 비의 현은 새벽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붉은 단풍잎을 눈에 담은 취객이 노래방 지하 계단 입구에 주저앉아

별의 해안을 적시는 빗소리를 빨고 있었다

그는 이미 볼트와 너트 사이를 메운

현란한 탬버린 소리에 올라탔다가 내려와

계단에서 귀를 씻었는지 모른다

얼굴을 고치며 노래방 계단을 올라오는 하이힐 소리가 폐타이어처럼 어두웠다

어둠을 뚫은 수억 개의 빗방울들이 낙관처럼 찍어놓은 지문,

수시로 변하는 사람의 무늬를 보았다

어둠을 바른 타락한 천사의 향수 냄새에서 동공을 지난 뱀의 허물을 보았다

주홍글씨를 숨긴 허물이었다

 

매일 밤 몸을 벗어야 몸에서 구원의 별이 뜨는 아이러니,

방랑의 무늬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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