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궤적

김덕진요셉 2019. 9. 16. 21:57

어떤 궤적/김덕진

 

폭설이 고딕체로 가슴을 훑던 날

우리는 처음 만났다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은 너의 냄새가 좋았고

시린 손가락 감각을 깨운 네 목소리는

하늘의 포옹을 담은 호수의 숨결처럼

내 마음에 잔잔한 수평선을 그려 넣었다

낮은 톤의 네 목소리는 나를 등지고 한 번도 돌아누운 적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세상이 뿌린 지문을 읽고 날마다 생의 궤적을

낯선 지명위에 조금씩 새겨나갔다

너는 순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구겨진 길은 피면서

너의 지도를 그렸다

어지러운 세상의 그늘 밑을 드나들어도

소낙비에 풀어진 비누처럼 마음의 윤곽이 흩어져 허공에 표류해도

우리는 피 흘리는 혼돈의 질서를 거의 매일 생의 일부로 읽었다

때로는 술을 깨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너의 자궁 속으로 숨어들어

뻐근한 새벽을 기다린 적도 있었다

오랜 시간 네 호흡은 내 손, 내 호주머니 속에서 나와 함께 했으나

너의 가쁜 숨과 온몸에 번진 붉은 부스럼을 치유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이제는 서로 각자의 궤적을 밟아야 할 시간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어둠이 전단지처럼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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