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심부름

김덕진요셉 2020. 1. 16. 14:32

어떤 심부름/김덕진

 

비릿한 바다냄새 묻은 파도 한 토막 저녁식탁에 올랐다

 

어느 한순간 파도가 그려주는 생선비린내,

깊이 잠든 뇌의 해마를 깨웠다

손바닥이 가려워지기 시작한다

밤의 문양으로 펼쳐지는 유년의 뜨락, 몸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던

미끌미끌한 꼬리지느러미가 달린 기억이 헤엄친다

결코 내 몸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등 푸른 기억이 징처럼 손바닥을 울린다

 

그때 번들거리는 비린내로 나의 하늘은 천천히 지워졌다

 

시골초등학교 저학년시절 어느 늦가을아침

할아버지는 지푸라기로 엮은 생선 몇 마리를 주시며 학교근처에 사시는

작은 할아버지 댁에 가져다 드리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다

학교까지 가깝지 않은 거리를 작은 손으로 들고 가기에는 무리였는지

무릎에 자주 차인 생선이 결국 지푸라기에서 모두 흘러내렸다

물음표만 남은 손으로 생선을 들어 올리려했으나

장어처럼 미끄러져나가는 생선을 보고 작은 손바닥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인절미에 콩가루를 묻히듯 흙길에 떨어진 생선들은 흙가루를 발랐다

손바닥에 고인 울음을 모두 쏟고 나서 길 위에 포개진 비린내를 품에 안았다

화살처럼 몸에 꽂히는 등굣길 시선을 꺾으며 흙투성이 된 생선을

작은 할아버지 댁에 갖다드렸다

그날 나는 생선들과 눈을 맞추지 못했고 나의 해는 하루 종일 흔들렸다

 

손바닥에 각인된 생선의 등지느러미 지문 아직도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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