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를 캐며/김덕진
어둠을 벗고 붉은 가슴으로 오는 네가 내 손에 상처입어 하얀 피를 흘릴까 매우 조심스럽다 연둣빛 바람이 부활하던 날 나는 햇살을 등에 업고 네가 흙냄새를 몸에 바르도록 돌을 베고 자는 들의 천사에게 맡겼다 그때 너의 가느다란 줄기로 설계한 가을이 고전처럼 덮여있었고 너는 지금 네가 펼쳐놓은 가을의 한 부분을 썰렁하게 허물고 있는 중이다 들의 천사는 밤과 낮을 책임지지 않았지만 너의 가슴이 붉게 물들 때까지 수호천사처럼 매일 네 생의 페이지를 함께 넘기며 여기까지 왔다 암흑 속에 묻힌 너의 꿈이 단단하게 뭉쳐지기까지 말을 잃어버린 나의 밤은 별빛에 찔린 채 잎사귀를 흔들었다 내가 여러 날 필사했던 밤은 사랑처럼 두근거렸다
이제 너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아도 된다
흙속의 캄캄한 침묵을 빨고 자란 꿈이 빠져나온 빈자리에
타다만 노을이 흥건하다
가을색채가 지워진 알몸의 밭,
맨 처음 아무것도 없었을 때 보다 더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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