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함/김덕진
우편함의 침묵과 마주쳤다
피할 수 없는 침묵의 외침은 독수리의 발톱보다
날카로웠고 침묵에 포위된 난
조그만 저항도 할 수 없이 우편함 쪽으로
끌려가야 했다
최종 판결문 같은 한 무더기의 고지서가
수직으로 서서 안개 덮인 벼랑을 부른다
발송자의 차가운 디지털 문자가 뾰족한 창을 들고
우편물 봉투 안에서 개미떼처럼 기어 다니며
출구를 더듬는다
봉투가 열리자 고지서의 디지털 숫자가 가장먼저
화살이 되어 두 눈을 찔렀다
어둠의 바다가 펼쳐졌다
그곳에 모여든 검은 그림자들의 살갗에서
부식된 희망의 비늘이 힘없이 떨어졌다
단풍든 내 등뼈로 무너지는 먹구름을 떠받치며
온 몸의 비늘을 지키고 있으나
어쩌면 오래전에 상대주의의 덫에 깊숙이
걸려들었는지 모른다
숨을 쉬는 편지봉투에
체온이 깔린 따뜻한 글을 넣으려고 펜을 잡았으나
딱히 보낼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