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가 있던 흔적/김덕진
누군가 서둘러 이사 간 흔적이 역력하다
팥고물 같은 흙구덩이에
정강이 높이까지 고인 햇살의 침묵은 깊이를 잴 수 없는
크레바스보다 깊다
썩은 새끼줄 같은 욕망이 누워 잠든 곳
산등성을 넘으며 듬성듬성 꽂힌
붉은 깃발의 명령으로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잠들었던
죽은 이들이 깨어나 이사를 가고
아직 떠나지 못한 이들이 흩어진 분신을 모아
서러운 향 피워 떠날 채비를 한다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에
붉은 천 조각 하나 매달렸을 뿐인데
그 깃발의 작은 펄럭임은 영혼을 매질하는 소리보다 크고
저승사자의 눈보다 무서웠을 것이다
여기에서 끝없는 휴식이 이어질 줄 알았을 텐데
개발지역의 경계선을 긋는 붉은 깃발은
누군가의 마침표를 열게 하고 사각의 하늘을 보여주었다
마침표가 있던 곳에 국화 한 송이 엎드려 조문한다
이사를 떠난 이들이 어디쯤에 마침표를
다시 찍을 수 있을 런지
그들이 남긴 흔적에 바람만 쓸쓸히 키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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