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과 소년

김덕진요셉 2020. 3. 29. 13:30

우물과 소년/김덕진

 

어렸을 때 우물 속 물거울을 깨트린 기억이

수십 년 묵은 후 낡은 문장이 되어 걸어 나올 줄은 몰랐다

어린 누나는 봄 몇 포기 캐서

난간 없는 우물가에 앉아 봄을 헹구고 있었다

누나 옆에서 놀고 있던 나는 우물 안에서 나의 행동을 흉내 내고 있는

작은 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 침몰된 나는

그 아이와 입을 맞추려고 얼굴을 숙이는 순간 물거울은 깨지고

이미지가 흩어진 물거울 속에서 아이와의 차가운 포옹으로

우리는 한 몸이 되었다

모든 틈새가 메워진 작은 체구, 물의 출구를 후벼 파는 손의 궤적은

내 몸속에서 꺼낸 몸의 언어였다

 

숨 막히는 포옹의 고통이 끝난 후 찾아온 고요를 덮고 몸이 부르는 찬가를 들었다

누군가 다급히 나를 다녀갔기에 우물속의 시간은

나를 건너지 못했다

 

유적 같은 내 초봄의 우물 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자국이 얹힌다

 

나는 온 땅이 뱉고 있는 초록색목소리를 몸에 바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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