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과 소년/김덕진
어렸을 때 우물 속 물거울을 깨트린 기억이
수십 년 묵은 후 낡은 문장이 되어 걸어 나올 줄은 몰랐다
어린 누나는 봄 몇 포기 캐서
난간 없는 우물가에 앉아 봄을 헹구고 있었다
누나 옆에서 놀고 있던 나는 우물 안에서 나의 행동을 흉내 내고 있는
작은 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 침몰된 나는
그 아이와 입을 맞추려고 얼굴을 숙이는 순간 물거울은 깨지고
이미지가 흩어진 물거울 속에서 아이와의 차가운 포옹으로
우리는 한 몸이 되었다
모든 틈새가 메워진 작은 체구, 물의 출구를 후벼 파는 손의 궤적은
내 몸속에서 꺼낸 몸의 언어였다
숨 막히는 포옹의 고통이 끝난 후 찾아온 고요를 덮고 몸이 부르는 찬가를 들었다
누군가 다급히 나를 다녀갔기에 우물속의 시간은
나를 건너지 못했다
유적 같은 내 초봄의 우물 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자국이 얹힌다
나는 온 땅이 뱉고 있는 초록색목소리를 몸에 바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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