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가 흘린 것

김덕진요셉 2019. 12. 12. 14:45

세입자가 흘린 것/김덕진

 

그것은 늘 조용한 예고와도 같았다

계약기간의 만료와 함께

그들은 또 다른 바깥으로 몸을 밀어 넣어야 한다는 사실

조금은 더 깊어진 생각으로 황색신호등을 업고 떠난다

서로 다른 길을 밟아왔던 사람들과의 짧은 만남 후에 남는 것은

늘 서툴고 어색한 헤어짐이다

내 발자국이 때때로 머물렀던 복도의 끝자락

떠나간 이가 문지방너머에서

언어의 조미료로 간을 맞췄던 그 빈방에

지우지 못한 흔적이 허전하게 남았다

맨 처음 마무 것도 없었을 때 보다 더 깊은 허전함이다

관절이 접힌 채 비스듬히 벽에 기댄 빨래건조대,

어쩌면 자기를 버리고 피부색깔이 검은 외국인 손에 이끌려

날짜변경선 너머에 있는 황톳길로 떠나야 할지 모른다

증발하지 못한 수분의 무게를 지고 숨을 참아야 했던 누적된 시간들이

옹이가 되어 기울어진 한쪽 어깨뼈에 박혔다

절벽에 매달린 시간을 참 많이도 말렸나 보다

 

낡은 빨래건조대의 등에 업혀

바삭하게 튀겨진 햇살로 수분을 털면서 쏟아낸 빨래의 말을 이제

모두 잊어야 할 순간이다

 

뒷걸음치던 겨울비 유리창에 밑줄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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