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화카드/김덕진
책상서랍을 정리하던 중에
언제부터 서랍 뒤로 넘어가
벼루처럼 누워있었는지 알 수 없는 내 지갑을 발견했다
헌 지갑 속에 유효기간이 만료되었지만
당시에는 잔액이 남았을 것 같은
오래된 공중전화카드 한 장 꽂혀있었다
아득히 먼 시간의 이면지에
눈사태 난 가슴에서 흘러내렸던 언어들이
잔설처럼 쌓인다
공중전화부스 안에 찍어 놓은 지문,
완결 짓지 못하고 도중에 끊겨버린 수많은 미완의 문장,
급하게 받아 적었던 아라비아숫자,
나의 내부를 흘렀던 이 모든 것들에 색깔을 입히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거슬러왔다
비밀을 가둔 좁은 공간으로 라면처럼 꼬불꼬불한 전화선을 타고
수화기 너머에서 불어오던 바람,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배불렀다
벽과 벽 사이에 흐르는 강을 건너기 위해
수없이 통과한 마그네틱신호등, 네가 있었다 내가 있었다.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렁이는 비오는 날을 기다린다 (0) | 2021.01.26 |
---|---|
말, 굳은살 박이다 (0) | 2021.01.21 |
빗소리 (0) | 2021.01.09 |
한파주의보 (0) | 2021.01.05 |
내가 옥상에 오르는 이유 (0) | 2021.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