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는 비 오는 날을 기다린다/김덕진
어쩌면 빗소리는 축복인지 모른다
땅을 포옹하는 빗방울소리가
지렁이의 마음을 두드릴 때마다 본능은 눈을 떴다
그것이 종족보존을 위해 사랑을 찾아 떠나는 길이던
어둡고 답답한 땅속의 은신처
탈출을 위한 것이던 상관없다
뼈 없는 몸으로 읽는 바깥세상의 물 묻은 소리,
자신이 지워질 수 있는 길로의 초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밤낮으로 달여진 암흑의 껍질을 벗는 일에
조금의 갈등이나 망설임도 없다
어둠이 둘로 갈라지는 순간 단 한 번의 고통으로
깨어나지 않는 잠을 잔다
시선의 높이는 늘 부담스러운 것이라서
처음부터 눈 없이 가장 낮은 바닥을 긴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햇살을 등에 업고 바닥을 기어가는 도중
제 이름이 바짝 말라 비틀리거나
어느 행인의 발걸음에 납작하게 눌리면
선글라스를 쓴 개미들이 이름주위에 온몸으로 성곽을 쌓는다
삶과 죽음의 놀라운 하모니,
황무지속의 일기장에서 신의 지문을 흠처 보았다.